나카마 카라토1621년, 후쿠오카번 초대 번주·구로다 나가마사의 명령으로 치수와 수상 운송, 관개용수 확보 등을 목적으로 운하 [호리카와]의 굴삭이 시작됩니다. 나카마 시에서 미즈마키마치, 야하타 서구 오리오를 지나 도카이만에 이르는 대공사였습니다. 그러나, 2년 후, 나가마사의 죽음으로 공사는 중단, 공사 재개는 130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1762년 6대 번주·쓰구다카 시대에, 온가강으로부터의 취수구 [호리카와의 나카마 카라토]의 완성으로, 호리카와는 드디어 전면 개통되었습니다. [카라토]에는 수문이란 의미가 있어 가늘고 긴 판을 수문의 구에 넣어 그 매수를 통해 수량을 조절하는 유니크한 것으로, 현 지정문화재로 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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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리카와에도시대 초기의 온가강은 큰비가 올 때마다 홍수를 일으켜 주위 마을에 큰 피해를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1620년 초대 지쿠젠 번주 구로다 나가마사는 온가 강줄기의 나카마에서 도카이만으로 인공 운하(호리카와)를 통하게 함으로써, 홍수방지·관개용수의 확보·물자 수송이 가능해 진다는 이유로 온가강의 축제와 함께 호리카와의 개착을 계획하였습니다. 공사는 1621년에 착공하였지만, 1623년 나가마사의 사망과 번 재정의 악화 등에 의해 중단하게 되었다. 그 이후 100년 후인 1730년대에 일어난 대기아를 계기로 신전(新田)개발에 따른 공사의 재개가 결정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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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쿠스나카마 카라토에서 호리카와를 따라 상류로 조금 걸어 올라간 장소에 2개의 큰 녹나무가 있습니다. 모두 시 문화재(천연기념물) 지정을 받고 있으며, 2개는 모두 높이가 22미터, 몸통 둘레는 각각 3.3미터와 4.8미터입니다. 나무의 나이는 약 250년~300년. 호리카와의 개착과 나카마 카라토의 완성보다도 오래 전부터 이 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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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자오세야마와 오차야 터후쿠오카번 번주·구로다 나가마사의 시대에 소코이노에 유렵장이 마련되고, 2대 번주·다다유키 대의 1638년, 고자노세야마에 별장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소코이노의 오차야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3대 번주·미쓰유키의 시대가 가장 충실하였다고 하며, 번주와 가로 등이 달 구경과 꽃놀이, 뱃놀이 등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 후 점차 축소되어, 1796년에 일단 폐지가 되었지만, 구로사키 여관에도 가깝고 교통 편도 좋다는 점에서 1812년에 재개되었습니다. 현재, 철거지에는 소코이노 초등학교가 세워져 있으며, 역대 번주가 놀았던 연못은 운동장이 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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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코이노 오칸에도 시대에 후쿠오카번 내의 나가사키 가도와 가라쓰 가도를 연결하고, 구로사키 여관으로 가기 위한 우회 도로입니다. 소코이노 오칸은 시간과 거리가 단축 가능한 편리성으로 많은 여행자와 상인에게 이용되었습니다. 이 소코이노 오칸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이 소코이노촌으로, 소코이노촌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 ![]() ![]() |
![]() 네코성지(former neko castle site)네코성은 높이 20미터 정도의 구릉에 무로마치 시대(15세기), 아소 씨의 단성(端城)으로서 지어졌습니다. 아소 씨와 무나카타 씨의 수 차례 전투의 장소가 되었지만 승부가 나지 않고 나카마 시의 시 구역은 양 성씨에 의해 분할 통치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1578년에 네코성은 무나카타 씨의 외성이 되었습니다. 네코성에서 봉화를 올리면 온가, 구라테, 무나카타 일원에 신호를 주는 것이 가능하였다. 적이 공격해 오면 봉화 연기가 높아지고, 성에서 공격하러 나가면 연기가 낮아 진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1580년, 다카토리 성주·모리 시게자네가 이끄는 1000명의 군세와의 전투가 유명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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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보리타테 유적은 현재의 시영야구장 주변에 해당하는 구릉에 있었던, 야요이 시대 중기부터 후기 중반 경(대략 기원전 50년~서기 50년의 100년간)의 분묘군입니다. 석관 11개와 호관 1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중에 제 2호 석관에서 인골과 함께 철 무기와 패륜(貝輪)이 발견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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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과(鐵戈)철과는 길이 약 40.5센티미터. 야요이 시대(기원전 4세기쯤)의 철제무기의 하나로, 목제 손잡이를 칼의 연결부에 직각으로 붙인 것입니다. 원래는 말 위에서 사용하는 무기지만, 일본 국내의 것은 손잡이의 접속부가 작고, 의식 등에서 사용되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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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륜(貝輪)패륜은 고호우라로 불리는 조개를 가공한 것으로, 묻힌 사람의 팔에 장착된 형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고호우라는 남해에서 잡히는 조개로 북부 규슈의 사람들이 멀리 동남 아시아 등과 교역을 하고 있었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폐석산폐석은 석탄을 채굴할 때에 함께 채굴되는 불필요한 암석이나 토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폐석산은 이 폐석이 쌓여서 산이 된 것입니다. 폐석산에는 상당한 양의 석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으며, 지압과 지열에 의해 자연 발화하여 산에서 많은 연기가 나고 있었습니다. 탄광으로 번창하였던 나카마 시에도 이 특징적인 형태의 산이 생기고, 당시 마을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현재는 나무로 덮여 폐석산으로는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시내에서 가장 높은 장소이기도 해서 정월에는 첫 일출을 보려는 등산객으로 붐비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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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다 이에코 생가 유적오다 이에코는 에도 시대 말의 소코이노촌의 상가 [고마쓰야]의 여주인으로, 오이세마이리(이세 신궁을 참배하는 일)를 목적으로 144일간의 여행을 하고, 그 여행의 모습을 [아즈마지 일기]에 기록한 인물입니다. [아즈마지 일기]는 약 370수의 와카(일본 고유 형식의 시)가 담겨져 있어서, 기행문학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에코의 높은 교양과 행동력에서 서민의 풍부한 문화와 에너지가 소코이노의 땅에서 양성되고 있었던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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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키가타 기요시와 게이쿄쿠도쓰키가타 기요시는 1847년, 지쿠젠국 온가군 나카소코이노촌(현 후쿠오카현 나카마시 나카소코이노)에서 게이쿄쿠도(迎旭堂)를 열고 있었던 유학자이기도 한 후쿠오카 번사 쓰키가타 켄과 이토 쓰네타리의 문인인 미야자키 세이안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 나오요시라고 이름 붙여졌다. 1881년 홋카이도에 건설된 가바토 슈지칸(형무소)의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4년간 재직하고, 적극적으로 들판을 개간한 것 외에 식사 등 수감자의 처우 개선에도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 지역의 마을 이름이 되고(현 홋카이도 쓰키가타초)현재에도 기타노마치와 나카마 시를 연결하는 가교입니다. |